[컬럼] 래디컬 마켓(Radical Markets)과 암호경제학(Cryptoecono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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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래디컬 마켓(Radical Markets)과 암호경제학(Cryptoeconomics)
  • 조중환 기자
  • 승인 2018.11.27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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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승 SK텔레콤 블록
체인 사업개발 유닛 팀장

 '블록체인'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블록체인 업계에서 필독서로 자리잡은 책이 있다. 바로 시카고대학교 로스쿨의 에릭 포스너(Eric Posner) 교수와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의 수석 연구원인 글렌 웨일(Glen Weyl) 박사가 쓴 <래디컬 마켓(Radical Markets)>이란 책이다.

이 책은 정치와 경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21세기 심화되어 가고 있는 소득 불평등, 생산성 정체와 경기 침체, 그리고 정치적 극단주의와 같은 현상을 '자유 질서의 위기'로 진단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시장'에서 찾고자 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시장이 사회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현재 집중화되어 있는 관료제 시스템과 자본주의적 독과점이 어떻게 비효율성을 낳는지, 현재 정치적, 경제적 제도들이 어떻게 갈등을 빚고 있는지에 대해 문제의 뿌리까지 접근하고 급진적인 시장 재설계를 통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래디컬 마켓'은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의 감상평과 추천사로 인해 더욱 주목을 끌었고 최근 미국과 체코에서 열린 ‘샌프란시스코 블록체인 위크(SFBW)’와 ‘데브콘 4’에서도 주요 아젠다로 논의되었다. 이더리움 진영에서는 '래디컬 마켓'의 아이디어를 온체인에서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고, 투표 실험과 거버넌스에 대한 글렌 웨일과 비탈릭 부테린의 공동 연구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다. 특히 '래디컬 마켓'은 자본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시장 개념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다. 즉, '래디컬 마켓'은 자유 경쟁을 지향하는 시장의 탈중앙화 이념과 원칙을 복원하는 제도적 재배열까지 나아간다. 그렇다면 '래디컬 마켓'이 지향하는 래디컬의 의미는 무엇인가?

 

 ▲ '래디컬(Radical)'이란?

'래디컬(Radical)'은 일반적으로 ‘급진적(急進的)’으로 번역된다. 래디컬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라디칼리스(radicalis)'로부터 나왔는데, 그 어원은 뿌리(radix(rhíza) ; root)다. 기초, 기반, 기원, 원천을 의미한다. 나무의 기둥이나, 줄기, 열매가 아니라 땅 속에 있는 뿌리 그 자체를 말한다. 어원대로 해석하자면 래디컬은 사실 '급진적'보다는 뿌리와 원천의 뜻을 가지고 있는 '근본적(根本的)' 또는 '근원적(根源的)'이라는 번역어가 더 적합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뿌리를 문제삼는 것일까? 래디컬은 뿌리를 건드린다는 뜻이다. 지금의 모습을 고정 불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다는 것을 포함한다. 뿌리까지 뒤집고 뿌리를 파헤친다는 것은 얼마든지 다른 모습의 세계가 가능하다는 뜻한다. 래디컬은 결국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세계 질서의 본질적인 변화를 지향한다. 과거의 실패를 교훈삼아 성찰과 반성을 통해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실천이다. 그런 의미에서 래디컬의 정신은 근원적이면서도 급진적이다.

‘래디컬 마켓’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경제적 제도의 한계에 직면해 균열의 틈을 파고들어 뿌리를 흔들고 새로운 답을 찾는 노력이다. 현존하는 제도의 모순과 타협하지 않고 문제의 표면이 아닌 기원을 찾아내 궁극적인 해결에 대한 기획이다. 도처에 팽배해있는 중앙화된 관료적 엘리트주의나, 비현실적인 수준의 자유시장을 전제하고 모든 것을 자유에 맡기는 자유지선주의(Libertarianism)의 한계를 모두 뛰어넘고자 한다. 그렇다면 '시장'이라는 도구로 어떻게 새로운 사회경제 시스템을 설계할 것인가? 어떻게 시장의 자유(Rreedom)와 경쟁(Competitiveness), 그리고 공개(Openness) 원칙을 복원하고 미래를 선도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 것인가?

▲ Source = 'radicalmarkets' Homepage

 ▲ 사적 소유는 독점을 낳는다

에릭 포스너와 글렌 웨일은 자본주의의 재산권에 대한 도발적 의견을 제시한다. 과도한 지대추구는 시장의 효율과 역동성을 저해한다. 반면 공동소유를 채택할 경우 투자효율성은 보장되기 어렵다. 이때 글렌 웨일은 19세기 미국 경제학자 헨지 조지의 ‘지공주의(地公主義, Georgism)’를 출발점으로 하되, 1996년 노벨 경제학 수상자 윌리엄 비크리(William Vickrey)의 경매 이론을 전면 도입해 부동산 시장의 혁신을 제안한다. 즉, 암호경제학의 핵심인 게임이론과 메커니즘 디자인이 ‘래디컬 마켓’을 구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래디컬 마켓’에서는 영원불변의 사적 소유나 재산권 행사는 가능하지 않다. 토지를 비롯한 사적인 부는 적정 가치로 양도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이루어진다. 재산의 가치는 소유자 자신이 직접 제시한 세금 부과 기준과 동일하고 이 세금은 공공재원으로서 모든 시민에게 공평하게 분배된다. 소유자 입장에서는 해당 재산의 가치를 높게 매길 경우 이에 해당하는 많은 세금을 내야하고, 가치를 낮게 매길 경우 세금은 낮출 수는 있지만 누군가 매수를 희망할 경우 그 가격으로 양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COST(Common Ownership Self-Assessed Tax)’ 모델이다. 즉, COST는 부동산 자산에 대해 소유자 스스로가 가격을 매기고, 그에 근간해 세금을 징수한다. 그리고 그렇게 매긴 가격 이상으로 누가 매수 주문을 내면 즉시 양도해야 하는 항시적 경매 시스템이다. 이러한 경매 시스템은 부동산의 공정가치를 실현하고 소유권 이전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독점화를 견제하고 시장의 긴장을 유지한다.

 

 ▲ 래디컬 민주주의

래디컬 민주주의는 1인 1투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혁신적인 투표 방법이다. 1인 1투표는 각 투표 아젠다의 중요성에 대한 유권자별 가중치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자칫 잘못할 경우 유권자 군중의 감정에 휩쓸린 여론 쏠림 현상을 낳고 민의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다.

'제곱 투표(Quadratic Voting)' 방식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권자에게 정책 참여에 사용할 수 있는 크레딧 총량을 지급하고 추가적인 투표권 행사를 위해서는 크레딧이 제곱으로 증가하는 투표 시스템이다. 자신이 그저 주어진 문제에 대한 찬반의 입장을 밝히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선호의 정도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핵심적인 아이디어다.

유권자는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 높은 선호도와 의사를 표시할 수 있게 된다. 1인 1투표 방식은 대중의 독재(Tyranny of Majority)에 빠지거나 소수자의 선호도가 반영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지만 제곱 투표 방식는 권력의 독점뿐만 아니라 무임 승차 등과 같은 투표 부작용도 막게 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탈중앙화를 외치는 주요 블록체인 플랫폼마저 사실상 소수의 해쉬파워 경쟁으로 독점화되어가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제곱 투표 모델은 블록체인 거버넌스 이슈를 해결하기 위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노동시장의 세계화

래디컬한 노동시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자본시장의 세계화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의 세계화를 만들고자 에릭 포스너와 글렌 웨일은 탈중앙화된 비자 정책, ‘VIP(Visas between Individuals Program)’를 제안한다. 현재 미국의 H-1B 비자는 고용주가 노동자를 ‘스폰서’하는 취업 비자다. 그런데 이러한 유형의 비자를 확대 적용하여 개인이 이민자를 직접 ‘스폰서’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VIP다.

특히 개인뿐만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에게 VIP 프로그램 규정 설정 권한을 제공하면 커뮤니티가 주도적으로 수요에 맞는 이민자 기반 노동시장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VIP는 물질적인 소득과 정치적 영향력 차원에서 국가 간의 불평등 문제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래디컬한 노동시장 설계를 통해 이민자 노동력으로 창출되는 가치가 더 많은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문어발을 해체하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독점에서 비롯한다. 1890년 미국에서는 불공정 경쟁과 거래관행을 금지하기 위한 ‘셔먼법(Sherman Antitrust Act)’이 제정되고, 이어 1914년 ‘클레이턴법(Clayton Antitrust Act)’이 실행된다. 이러한 독점금지법에서는 가격차별(Price Discrimination), 끼워팔기 계약(Tying Contracts), 배타적 거래(Exclusive Dealing), 합병(Merger), 이사 등의 겸직(Interlocking Directorates) 등에 관한 특별한 규정을 통해 불공정 상거래 관행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하지만 차츰 기업의 소유권 개념이 변화하면서 대형 뮤추얼 펀드(Mutual Fund)에 자본이 집중되기 시작한다.

블랙록(Blackrock), 뱅가드(Vanguard),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스(State Street Global Advisors)와 같은 초대형 자산운용사들이 전세계 다수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자산운용사들은 같은 업종의 경쟁기업 주식을 소유함으로써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실질적으로 산업을 독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경쟁을 저해하는 담합이 생겨나고 결국 수요 독점으로 과거 독점금지법은 산업자본의 독과점을 비교적 잘 막아 왔지만, 대형 기관투자자들의 자본시장 독점을 막고 시장을 더 분산화하기 위한 새로운 반독점법 모델이 필요하다. 이에 '래디컬 마켓’에서는 기관투자자들이 같은 업종에서 투자할 수 있는 기업의 수와 소유 가능 비율을 제한하자고 제안한다. 소액 투자자 또는 기관은 기업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의 소유권을 가지지 못하므로 포트폴리오 투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 노동으로서의 데이터(Data as Labor, DaL)

래디컬 마켓에서는 데이터 생산은 곧 노동으로 규정된다. 정치·경제·사회 시스템 전반이 AI로 자동화되고 지능화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빅데이터 수집과 분석이 필요하다. 디지털 생태계에서는 이미 다수의 사람들이 데이터 생산자로서 빅데이터 공급 활동을 통해 경제 시스템에 기여하고 있음에도 지금은 그 가치를 전혀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수도 없다. 하지만 개인은 글로벌 디지털 경제의 데이터 노동자이면서 소비자이다.

데이터 노동의 가치를 공정하게 산출할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이 요구된다. 즉, 과거 노동으로 규정되지 않은 행위를 노동으로 규정하고 적절한 보상을 지급해야 한다는 의미다. 더 이상 공짜 노동은 사라진다. 인공지능 시대를 위한 새로운 노동 경제학이 실현된다.

 

 ▲ ‘래디컬’의 실현

글렌 웨일에 따르면 지금의 정치적, 경제적 논쟁의 대부분은 어쩌면 빈약한 상상력의 결과일지 모른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좌파-우파 간 자기 파괴적인 갈등에서는 빨리 벗어나야 한다. 물론 이 책에서 제시한 ‘래디컬 마켓’의 이상은 처음부터 현실세계에 적용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사회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보다는 단계별, 그룹별 소규모 실험을 통해 효과성을 입증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COST, QV, VIP 등은 각각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상호 결합될 경우 경제, 사회, 정치, 세계화의 관점에서 막대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다. COST에 기반한 크레딧 경제 시스템 위에 QV를 통한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이 실현되고, VIP를 통해 노동력의 자유로운 글로벌 이동이 보장되는 래디컬 마켓은 기존 경제 시스템의 특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부의 기회를 창출하며 새로운 미래사회의 초석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디어의 실제적 도입을 위해서는 넘어야할 기술적, 제도적 한계가 존재한다. 무엇보다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 형성이 필수적이다.

다만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은 지난 수십 년 간 경제적 메커니즘 설계에 대한 많은 연구와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경매 이론과 같은 메커니즘 디자인 모델은 이미 공공자원 배분과 주파수 경매에도 적용되고 있다. 정책 설계에도 다양한 활용이 시도되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기반으로 중앙화된 관료제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고 효율적이면서도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래디컬 마켓’의 이상은 암호경제학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래디컬 마켓’과 암호경제학은 바로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이상이자 강력한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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