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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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증의 역사
  • 최형주 기자
  • 승인 2020.08.2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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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인증에서 오늘날 생체인증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 인증 기술

지난 5월 국회에서 전자서명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공인인증서가 폐지됐다. 하지만 공인인증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법 개정을 통해 신기술이 적용된 다른 인증서로도 전자서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히스토리를 통해 다양한 인증의 종류와 역사를 살펴보고, 앞으로 어떤 인증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알아보자.

 

우리 조상들의 신분증

삼국시대엔 ‘부절(符節)’이라는 신분증이 존재했다. 고구려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고주몽의 큰아들 유리는 부러진 칼 한쪽을 고주몽에게 가져가 아들로 인정받았다. 삼국사기 설씨녀 열전에서는 6년 만에 만난 정혼자를 확인하기 위해, 헤어지기 전 두 조각으로 쪼개어 나눈 거울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같이 두 조각으로 쪼개거나 제작돼, 포개어지는 것들을 부절이라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주로 사신들이 대나무, 옥 따위를 둘로 갈라 하나는 조정에 두고 하나는 본인이 가지고 다니며 신분 인증의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백제와 신라의 귀족들은 신분에 따라 허리띠의 재료, 색, 수를 달리해 자신의 위치를 드러냈다. 조선 태종 때는 이름, 직업, 계급을 기록해 신분증의 역할을 하는 ‘호패법’이 실시됐다.

1436년, 세종 18년엔 사람의 얼굴이나 팔에 문신을 새겨 범죄자를 식별하는 ‘자자형(刺字刑)이 시행됐다. 이 제도는 무려 300년이 넘게(1740년, 영조 16년 폐지) 이어졌으며, 일반 절도자들에게는 ‘절도(竊盜)’의 2글자를 새겼고, 소나 말을 도적질한 자에게는 ‘도우(盜牛)’, ‘도마(盜馬)’를 각각 새겼다.

성종 이후부터는 양쪽 뺨에 글자를 새기는 경면형이 주류를 이루었고, 연산군 때는 도망친 노비를 잡아 남자는 왼쪽 뺨에 ‘도노(盜奴)’를 여자는 오른쪽 뺨에 ‘도비(盜婢)’를 새겼다고 한다.

 

해외의 인증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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