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해커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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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해커의 방식으로
  • 석주원 기자
  • 승인 2020.07.1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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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발전을 위해 필요한 도전 정신

[글=이본용 | 오퍼스엠 기술총괄이사(CTO)]

알 이즈 웰!
알 이즈 웰!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세 얼간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한 인도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인도는 기본적으로 인구가 많고 수학이나 과학 분야의 인재도 많다. 하지만 종교 분쟁과 카스트 제도로 신분 이동이 제한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인도에서는 신분 이동의 수단으로 공학자라는 직업이 인기가 높다. 이 영화는 이러한 인도 사회의 부조리를 재미있게 풀어낸 코미디 영화다.

영화는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부조리를 보여주고 이에 반발하여 저항하는 주인공 ‘란초’와 친구들을 통해 남들과 같은 삶이 아닌, 주체적인 삶을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의 주인공 란초는 대학에 남아 있는 악습과 권위에 정면으로 맞서며 기존 규칙과 사회적 관습을 중시하는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대립한다. 이 영화가 이상적으로 기억된 이유는 영화 속 주인공의 행동들이 마치 ‘해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IT업계에서 초창기 ‘해커’라는 단어는 기존 시스템을 무단 침입하거나 파괴하는 사람을 일컬었다. 하지만 지금은 ‘크래커’라는 단어가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고, 해커라는 단어는 조금 더 광범위한 의미로 활용되고 있다.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IPO를 앞두고 투자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해커의 방식(Hacker Way)’이라는 단어로 페이스북의 혁신성을 표현했다. 또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모여 과제를 해결하는 이벤트인 ‘해커톤(Hackathon)’은 해커와 마라톤의 합성어이기도 하다.

이처럼 업계에서 해커라는 단어는 이제 기존의 기술을 다른 방식으로 적용함으로써 파괴적 혁신을 이루는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기술을 바탕으로 문제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을 해커라고 부른다.

 

블록체인을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블록체인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절반 정도는 블록체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머지, 블록체인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다시 절반 정도는 블록체인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봐 왔다.

블록체인 기업에 근무했을 때에도 다수의 동료가 기술적 측면에서만 기여를 했고, 사업 모델은 외부의 것을 모방하기 바빴다. 심지어는 교수나 관련 기관의 장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 역시 매년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 놀랄 때가 종종 있다. 생각해 보면 비트코인이나 ICO와 같은 가상자산이 거의 유일한 대성공이었던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우리가 블록체인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여러 기술의 총 집합체이다. 블록체인이라는 이름처럼 블록이 체인을 이루는 구조만으로 블록체인의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암호학으로 대표되는 수학적 원리와 자료구조 및 네트워크 기술의 도움으로 비로소 블록체인이 완성된다.

최근 블록체인을 사용하지 않고 블록체인 기술인 해시 함수와 영지식 원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을 고객사에 제안한 적이 있었는데, 상당히 흥미로워 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형태라서 그랬겠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블록체인이 IT 업계의 화두가 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우리 업계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과 같은 블록체인들을 분해하고 분석하면서 그 안에 담긴 기술들을 들여다보았다. 그 기술들로 반드시 블록체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간 개발자는 기술을 연구 개발했고, 사업 발굴자는 사업 모델에 큰 노력을 쏟아 부었다. 이제는 같이 힘을 합쳐 새로운 결과물을 탄생시켜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고객들이나 블록체인 업계 내에서도 토큰이나 투표, DID 같은 소재는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어서 더 이상 큰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래서 도메인의 문제를 특정 블록체인이 아니라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해서 접근해야 한다. 과거 빅데이터나 클라우드의 물결이 밀려왔을 때를 돌이켜 생각해보자. 많은 기술적 요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왔다. 그 때에 비하면 거짓말처럼 조용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분야에서 가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현재 우리 블록체인 업계는 완전히 멈춘 듯 보인다. 블록체인 관련 투자는 줄었고 많은 관련 업체와 인재들이 탈 블록체인을 하고 있다. 장밋빛 미래를 외쳤던 불과 몇 년 전에 비하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라 하겠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이더리움 거래 수수료가 비트코인 수수료를 앞지르고, 가상화폐와 관련된 많은 요소들이 제도권 안으로 편입되고 있다. ICO로 많은 잡음이 있었음에도 역시 많은 플랫폼 프로젝트가 결과물을 공개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솔루션과 서비스를 제안하고 있다.

지금의 블록체인 업계는 많은 실험이 실패하고 새로운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커들이 여러 문제를 블록체인 기술로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느리지만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성과를 쌓고 있다. 과거에 빅데이터나 클라우드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한번도 보지 못했고, 겪지 못했던 분야이기에 당장은 실패가 더 많을 수밖에 없지만 어쨌든 계속 나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사람의 부정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내가 블록체인 업계에서 일하는 이유는 이 기술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지만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면 블록체인 업계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이 든다.

이본용 오퍼스엠 CTO
이본용 오퍼스엠 CTO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시도에 대한 우려 때문에 업계가 많이 움츠러든 것도 사실이다. 도전을 피하고 검증된 솔루션만을 제안하면 실패는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블록체인의 실용성을 증명할 수 없다.

블록체인 업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앞두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적당히 포장된 SI 사업을 할 것인지, 아니면 아무도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을 적용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정해진 틀을 깨고 수많은 도전에 나섰던 해커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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